맹인 아내로서 내가 겪은 고통
1972년 8월, 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사유에 속했다.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결국 피츠버그대학교 9월 학기 개강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한미재단총재와 연세대 총장이 공동으로 제안한 청원서에
문교부장관이 서명함으로써 미국 유학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LA에 도착해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양부모님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에는 개강 전날 도착했다.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맹인재활센터에서 일했고, 입덧도 심했다.
그러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돕지 않으면 강의실에도 갈 수 없어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온 힘을 다해 강의실로 뛰어가 보니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항상 잘하다가 한 번 실수했는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 섭섭한 마음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에 와서 처음 한 부부싸움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보행훈련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 강의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던 차에 결단의 기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행훈련을 받아도 자주 다니지 않은 곳이나 생소한 지역을
갈 때는 여전히 정안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보행훈련을 받아 나에 대한 의존도가 다소 줄어들 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안내해주어야 했다.
어린 두 아들을 남에게 맡긴 채 남편의 대학원 강의실을 향해 떠날 때,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강의가 먼저였다.
맹인 아빠에게 젖먹이 아기를 맡기고 도서관에 자료 심부름을 갈 때면
혹시 불이라도 날까 불안했지만 그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는것이 먼저였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고달프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민하던 어느 날, 캠퍼스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한 맹인 여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다가가 한국에서 유학 온 맹인 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그네를 밀어주던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했다.
과부가 과부사정을 안다고,
우리 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초면에 우리 형편을 털어놓았다.
그 부부는 우리에게 자기 집 3층을 내줄 테니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대신 식사 후 설거지를 해주고, 두 내외가 외출할 때 어린 두 자녀를 돌봐달라고 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가족의 생계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할 것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집에 살면서 매일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머지않아 박사가 될 남편을 내조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주관 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남의 식모살이나 하는 처지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가 오히려 아파트에 살 때보다 더 행복했다.
우리와 처지도 같고 동년배라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를 배우는 계기도 되었다.
또 두 살 된 진석이도 네 살, 다섯 살이던 그 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둘째 아이 진영이가 생겨 더욱 감사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절대 좌절하거나 울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맹인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내외는 출세지향적이 아닌, 성취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맹인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때마다 오히려 성취감을 느꼈다.
또 쾌락보다는 보람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승리감과 보람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1976년 4월 25일,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느낀 보람과 행복이란….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났다.
물론 아무나 맹인의 아내가 되어 어려운 내조를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때로는 희생을 요하는 힘겨운 내조를 할 때도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취를 나의 성취로,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학사복을 입었지만, 남편이 받은 박사학위가
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느껴져 더 행복했다.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이 겹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편은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8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맹인이 어떻게 눈뜬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논문지도를 할 수 있겠느냐며
어디에서도 남편을 채용하지 않았다.
무직자인 박사 남편, 아직 어린 진석이, 갓 태어난 진영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었다.
장학금으로 지급되던 생활비가 졸업과 동시에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만료된 유학생비자를 다시 살리기 위해
남편이 포스트 닥터럴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오도가도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배수진을 친 남편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오히려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성공의 조건으로 바꿔주실 테니 인내하며 좀더 기다려봐요.
부디 아무 걱정 말고 연구에 몰두하고 직장 찾는 노력이나 계속하세요.”
지금도 남편은 당시 자신의 고통을 함께하면서 그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줄 때가
가장 고마웠다고 말한다.
하루는 나의 격려가 통했는지 남편이 면접을 다녀오더니 취직이 되었다고 했다.
기적이었다.
이번에는 일단 학생비자로 취직이 된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1월 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어 서둘러 인디애나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인디애나에 도착해 남편의 첫 출근과 함께 나는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남편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터리 클럽 회원으로 매주 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운전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병이라도 나서 내가 누워버리면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질 텐데
다행히도 그런 기억은 없다.
아마도 내조하는 기쁨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보람이 엔도르핀을 나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
남편이 인디애나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2년 가까이 되던 1987년 9월,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 언론은 ‘우리나라 최초 장님 박사 탄생’,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등의 제목으로 남편의 귀국을 대서특필했다.
그때 그 기사를 본 연세대 윤형섭 교수가 <조선일보>에 평균점수’라는 제하의 칼럼을 썼다.
내용인즉슨, 앞 못 보는 장님이 박사가 되었다기에 기사를 읽어보니
그 뒤에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며 석사학위 교사까지 된 부인의 희생적인 사랑과
내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여성의 평균 점수를 올려주었다는 것이다.
1983년 6월 5일은 남편이 최초로 국제무대에 등단한 날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로터리 세계대회에서 그가 연설을 한 것이다.
23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1만6000명의 세계 민간 지도자가 모인 단상으로 남편을 안내하는데,
연설자도 아닌 내가 극도로 긴장해 떨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군중의 시선을 볼 수 없어서인지, 그다지 긴장하지 않고 연설했다.
그리고 남편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은 450만 명에 달한다.
그중 2500명이 대통령의 임명을 받으며
그중 500명은 상원 인준까지 받아 이름 앞에 ‘honorable’이 붙는다.
먼 이국땅에 유학 와서 이민자로 정착한 지 사반세기 만에
남편은 ‘honorable’이라는 경칭이 붙는 연방정부 최고 공직자가 되었다.
대통령 직속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의 지팡이가 되어 부시 대통령 앞으로 그를 안내할 때 느낀 감회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불쌍한 맹인 중학생을 안내하기 시작한 지 40년,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강점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하나의 팀으로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게 되었다.
1972년 신혼부부로 미국 땅에 도착할 때 태중에 있던 진석이는
링컨 대통령의 장남 로버트 토드와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하버드대 동문이 되었다.
그리고 안과의사의 꿈을 이루어 듀크대학병원에 근무 중이며,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를 맞았다.
작은아들 진영이는 필립스 앤도버 아카데미 출신으로 부시 대통령 부자와 동문이다.
약관 27세의 나이로
연방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고문변호사이며
아내 역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이민자로 미국 땅에 와서 교육자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육인명사전, 미국여성명사인명사전에 올라 역사 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지난 2003년 5월 29일, 내 생일에 아들 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아들, 며느리 네 명의 박사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당신 정말 행복하겠소.”
진영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잖아요.”
그렇다. 한집에 다섯 명의 박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팡이가 되어 헌신적인 아내로
두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며느리들까지 본 어머니로 살아온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처럼 선명한 비전으로 내 인생을 인도해 신앙 안에서 명문가를 만드는
.
'가슴으로 읽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꼬맹이의 아빠 에게 보내는 편지. (0) | 2011.03.31 |
---|---|
스무 살 어머니. (0) | 2011.03.22 |
이젠 널 사랑할수 없잖아. (0) | 2011.02.27 |
대한민국 의사들의 하루 (0) | 2011.02.27 |
감동적인 사랑. (0) | 2011.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