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

平山申氏 始祖 장절공 신숭겸(壯節公 申崇謙)

四時春 申澈均 2016. 10. 6. 20:44

 

 

장절공 신숭겸(壯節公 申崇謙)

 

(?~927,신라말~태조 10년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다.

초명은 능산(能山),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신숭겸장군이 성장하던 무렵인 서기 9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신라의 정치상황은 한마디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없는 혼란기였다.

9세기 말엽부터 빈발한 농민폭동은 무장봉기로 발전했고 1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新羅는 완전한 통치 능력을 상실하여 궁예(弓裔)의 태봉(泰封)과 견훤(甄萱)의 후백제에게

신라는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경주(慶州) 주변만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후삼국 시대는 견훤이 나라를 세운 서기 892년부터

고려가 삼국을 재통일한 서기 936년까지의 약 44년간 지속 되었다.

신숭겸장군은 본래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문무를 연마 하였으니

비래산 신유봉등지에 독서당 신공정 사대(射臺) 철갑암 계마석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그는 뒤에 광해주(지금의春川)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 스러웠던 그는 궁예가 901년 후 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으며 이후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馬軍將軍)에 올랐다.

 

궁예의 후 고구려는 날로 강성하여졌으며

국호도 ★ 대 동방국 ★ 이란 뜻의 마진(摩震)을 거쳐 ♣ 통일천하 ♣ 를 의미하는 태봉(泰封)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궁예는 시간이 갈수록 폭정을 일삼기 시작했다.

궁예가 인심을 크게 잃자 신숭겸장군은 918년 6월에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등과 함께 궁예를 추방하고 덕망이 높았던

侍中 왕건(王建)을 옹립하여 고려를 건국하니 이들이 바로 고려 건국의 원훈들이다.

신숭겸장군은 개국 1등공신으로 녹훈되었으며 왕건으로부터 申씨라는 姓을 賜姓 받았다

왕건이 어느날. 장졸들을 거느리고 平州 (지금의平山)땅으로 사냥을 나갔을때

고공(高空)을 날으는 세마리의 기러기중 세번째 기러기 왼쪽날개를 왕명대로 맞히니

왕건이 과연 신궁이라 감탄하고 기러기 날던 땅 300결을 하사하고 本貫을 平山으로 삼게 하였다.

 

신숭겸장군은 다른 공신들과 함께 고려의 국력신장과 통일 과업에 몰두했다.

고려태조 10년(927) 9월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공하여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도읍을 유린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왕건은 직접 장졸을 인솔하여 경주로 향했다.

하지만 그때 견훤은 이미 후백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에 왕건은 견훤의 퇴로를 추격, 현재 대구지역인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매복된 견훤군에 포위되어 위급한지라

용모가 비슷한 신숭겸장군은 위왕대사(爲王代死) 하기로 결심하고

왕건을 애수(?藪)에 피신케한 후 왕의 갑옷으로 변장하여 김락(金樂)과 함께 장졸을 인솔하고 혈전 하였으나

견훤군이 고려왕으로 착각한 신숭겸장군에게 집중 공격하니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전사 하였으며

두상은 견훤군이 취해 갔다.

공산 싸움에서 가까스로 목슴을 건져 도성으로 돌아온 왕건은

신숭겸장군을 비롯한 여러 부하 제장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신의 실책을 크게 자책했다.

특히 개국 1등공신 신숭겸장군의 비참한 죽음은 왕건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왕건은 신숭겸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벽상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저정공신 (壁上虎騎衛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翊戴 匡衛怡輔 砥節底定功臣)에 추봉하고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했으며

그의 동생 능길과 아들 보장등을 元尹으로 등용하고

순절지 대구에는 순절단과 지묘사를 창건하여 그의 영정을 봉안하고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頭面을 彫造하여 예복을 입혀 禮葬하고 願堂을 세워 冥福을 빌게 하였다.

또한 왕건은 태백산성에 태사사(太師祠)를 창건하여

壯節公 신숭겸(申崇謙)과 忠節公 유금필(庾黔弼) 武恭公 복지겸(卜智謙)의 철상을 주조하여 봉안 하였다.

 

 

 

高麗史世家에 성조보공 배홍신복유최 육공 도형대어여향 대묘춘추불특

(聖祖報功裵洪申卜庾崔六公圖形對御與享大廟春秋不?)이라 하였으니

太祖 어진(御眞)과 같이 영정이 봉안 되었으며

고려 예종(睿宗)께서는 신숭겸과 김락을 기리는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으니,

충절을 기리는詩, 공신을 생각하는 단가,를 지어 지금도 전해 지고 있다.

악강지(嶽降址) 곡성에는 용산단 과 덕양사 가 있고

순절지, 대구에는 순절단 과 모영재, 표충재 가 있으며

묘소는 태조께서 옥룡자(玉龍子) 도선(道詵)의 소점(所占)으로 고려태조(高麗太祖)의 신후지지(身後之地)였던

춘천 서면 비방동 화악산록(華嶽山麓) 옥등괘벽혈(玉燈掛壁穴)에

묘봉을 셋으로 예장(禮葬) 3대 유적지에는 각각 동상이 건립 되어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마전의 숭의전, 서천 율리사, 사천 경백사 에 배향되었다.

2007년 10월에는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

 

평산 신씨 파계(派系)

 

평산 신씨의 시조인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15대 손에 의해 20개의 파가 생겨 났다.

11世 12世 13世 14世 15世 (派를 만드신 분) -파명

연(衍) 중명(仲明) 즙(즙) 익지(翼之) 아(雅) - 밀직공파(密直公派)

이(彛) 정도(丁道) - 봉상윤공파(奉常尹公派)

정리(丁理) - 장령공파(掌令公派)

안(晏) 감 (鑑) - 현령공파(縣令公派)

개 (槪) - 문희공파(文僖公派)

효 (曉) - 정언공파(正言公派)

건 (虔) - 창파(創派) 안함

군평(軍平) 규(珪) 하 (夏) - 한성윤공파(漢城尹公派)

혼(琿) 호 (浩) - 사간공파(思簡公派)

연 (演) -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기 (淇) - 온수감공파(溫水監公派)

수 (璲) 효창(孝昌) - 제정공파(齊靖公派)

우 (瑀) 호(灝) - 전서공파(典書公派)

순 (珣) 인기(仁錡) - 이상공파(貳相公派)

현 (賢) 용희(用羲) 득청(得淸) - 판사공파(判事公派)

자명(自明) 중전(仲全) 윤공(允恭) 소(紹) - 현감공파(縣監公派)

유 (維) - 진사공파(進士公派)

강 (綱) - 감찰공파(監察公派) 윤안(允安) 시견(時見) - 판윤공파(判尹公派)

중해(仲諧) 국 (國) 도지(道之) - 참판공파(參判公派)

헌주(憲周) 욱(昱) 현 (玹) 우방(佑邦) - 군수공파(郡守公派)

     정 (玎) 우국(佑國) - 군수공파(郡守公派)

 

집성촌

칠곡 평산 신씨 제정공파(齊靖公派) 집성촌

칠곡군 약목면 복성1리 양지마을에는 평산 신씨 제정공파 후손 4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1950년대에는 200여호가 대규모 부락을 이루며 번창했다.

칠곡군 약목과 북삼에 평산 신씨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것은 4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목에서 태어난 신유(1619~1680) 장군은 27세에 무과급제해

흑룡강 부근에서 러시아군을 격멸해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을 저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도병마사와 삼도수군통제사, 포도대장을 역임한 신유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사당이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에 세워져 경북도 지정 기념물 제38호(1982년 8월 4일)로 지정돼 있다.

 

국무총리를 역임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도

칠곡군 약목면 출신으로 지역과 평산 신씨 가문을 빛낸 인물로 칭송을 듣고 있다.

 

 

 

 

아침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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